사말(四末, Novissima quattuor)
견진교리의 마지막 주제는 사말(四末)이다.
사말(四末)은 사람이면 피할 수 없는 인생의 네 가지 마지막 문제다
곧, 죽음과 심판, 천당과 지옥에 관한 문제다.
사말(四末)은 사실 우리에게 거북하고 불편하고 답을 내기 어려운 주제이다.
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이면서도,
죽음은 나의 가장 명확한 미래이면서도 제대로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내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 것인지 모른다.
또 죽은 다음에 나의 운명이 어떻게 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죽음이 어떤 이에게는 삶의 끝이 될 수도 있고,
죽음이 어떤 이에게는 새로운 시작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은 인생은 죽음으로써 모두 끝나지 않는다고 믿는다.
또한 하느님을 믿었던
하느님을 믿지 않았든
예외 없이 하느님 앞으로 나아가 심판을 받는다고 믿는다.
그 심판은 이 세상에서의 내가 어찌 살았는지를 빠짐없이 저울로 달아 셈하는 것이다.
“너는 신앙생활을 하였는지 하지 않았는지,
너는 은총은 어찌 사용하였는지,
너는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며 덕을 닦았는지...?”
등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조목조목 따지실 것이다.
그리고 그 심판에 따라 우리는 천당이나 지옥에 가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인생 사말(四末)에 대하여 답을 찾는 작업을 지난 3주간 동안 하였다.
우리가 지난 3주간 동안 다룬 신앙 · 은총 · 덕이라는 주제가 바로 그것이다.
첫 번째 견진교리 주제는 ‘신앙에 관하여’였다.
- 신앙은 이 세상에서 영원한 세상으로 건너가는 인생 나침판이라 하였다.
두 번째 견진교리 주제는 ‘은총에 관하여’였다.
- 은총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하느님의 생명과 하느님의 사랑이며, 성사와 기도와 공로를 통하여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세 번째 견진교리 주제는 ‘계명과 덕에 관하여’였다.
- 계명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았기에 오늘 간략하게 살피겠다.
계명은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내리신 윤리도덕적 규정이나 명령이다.
계명은 인간의 하느님과 소통관계를 유지하는 법칙이며 매뉴얼, 곧 지침이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계명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하시면서 은총과 신앙을 유지하고 성장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가르치셨다.
- 덕은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선으로 기울어져 가도록 각인시키는 것이라 하였다.
christian이란 말은 라틴어 christianus에서 온 말이다.
christianus는 follower of Christ, 곧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란 뜻을 가진 그리스어 Χριστιανός에서 왔다.
그리스어 Χριστιανός는 anointed one, 곧 ‘기름 부어진 이’이란 뜻을 가진 Χριστός에서 왔다.
그리스어 Χριστός one who is ‘존재하는 분’이란 뜻을 가진 헤브리어 מָשִׁיחַ(Mašíaḥ, messiah)를 번역한, 이란 말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마치도 거위가 각인효과에 따라 태어나자마자 본 이를 어미로 여기고 따르듯이 입문성사인 세례성사를 받고 그리스도를 졸졸 따라 다니는 사람이다.
오늘 우리는 네 번째 견진교리 주제인 사말(四末), 곧 죽음과 심판, 천당과 지옥이라는 거북하고 다루기 어려운 인간의 마지막 문제에 도달하였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죽을 때가 가까워지면 몹시 무서운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이는 하느님께서 사람이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게 되면 작동되도록 인간 양심에 새겨 놓으신 프로그램 때문이다.
나의 죽음을 느끼게 되면
- 내가 인생을 어찌 살았는지,
- 이 세상에서 무엇을 했는지,
- 죽은 뒤에 나는 어찌 되는 것인지
등에 대한 물음을 던지게 된다.
흔히 죽음을 맞는 과정을 5단계로 구분한다.
첫 번째는 ‘내가 왜 벌써 죽어야 하는가?’하는 죽음에 대한 거부(denial)의 단계다.
두 번째는 ‘왜 나만 죽어야 하는가?’라며 자신의 죽음을 원통해 하는 분노(anger)의 단계다.
세 번째는 ‘내가 좀 더 살 수 있는 의술이나 약이나 방법이 없을까?’라며 죽음과 흥정을 하는 타협(bargaining)의 단계다.
네 번째는 ‘내가 가는 죽음에 길에는 아무도 함께 하지 않는구나!’ 하는 서운함과 야박한 인심 때문에 겪는 우울함(depression)의 단계다.
마지막 다섯 번째 단계는 자신에게 살 가망이 전혀 없음을 알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수용(acceptance)의 단계이다.
이 같은 단계 하나하나가 두려움 속에서 진행된다.
이러한 죽음의 단계와 두려움은 자신에게 내리는 심판이다.
그리고 죽은 뒤에 자신이 가게 될 천당이나 지옥을 예감하고 저울질하는 것이다.
천당은 지긋지긋한 이 세상의 고통과 불행을 끝내고 영원하고 끝없는 행복을 삶이 계속되는 곳이다.
지옥은 이 세상 보다 더 소름끼치는 끝없는 고통과 불행이 계속되는 곳이다.
그런데 사람은 천당이든 지옥이든 알아 낼 수도 증명할 수도 없다.
죽어서 천당이나 지옥에 갔다가 살아 돌아온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죽음은 원래대로 되돌릴 수 없는 불가역적인 사건이기에 죽었다가 살아 돌아왔다는 임사체험은 완전한 죽음이 아니다.
숨이 끊어질 때 어떠한 일이 벌어지는지, 천당과 지옥은 과연 있는지는 오직 완전히 죽으셔서 땅에 묻히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만 확실히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일컬어 하느님 아버지 나라에서 오셨다고 증언하시면서 천당과 지옥이 있음을, 또 그곳이 어떠한 곳인지를, 또 어떠한 이들이 가는지를 수난 이전에 분명히 가르치셨다.
진복팔단, 하느님 나라와 부자, 회개하는 창녀와 세리, 씨앗과 누룩에 대한 비유 등과 같은 여러 비유, 어린이와 같은 사람, 부자와 거지 라자로, 최후심판 등 예수님께서는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분명히 가르치셨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천국의 존재를 부정하고 신앙을 거부하고 은총이나 계명 생활을 하지 않으면서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지옥에 떨어진다고 분명히 가르치셨다.
그래서 천국은 천국을 믿는 이들이 가는 곳이고, 지옥은 천국을 부정하는 이들이 가는 곳이 된다.
신앙을 갖고 있다는 것은 죽어서 갈 곳이 있다는 것이다.
반면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거나 거부하는 것은 죽어서 갈 곳이 없다는 것이다.
죽어서 갈 곳이 있는 사람이 가는 곳이 바로 천국이다.
죽어서 갈 곳이 없는 사람이 가는 곳은 바로 지옥이다.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산대로 죽어서 갈 곳으로 간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
인생은 뿌린 대로 거둔다.
밀 씨앗을 뿐린 사람은 밀을 거두고, 가라지 씨앗를 뿌린 사람은 가라지를 거둔다.
씨앗을 길바닥이나 자갈밭이나, 가시덤불에 뿌린 사람은 거둘 것이 없다.
좋은 땅에 씨앗을 뿌린 사람은 30배, 60배, 100배를 거둔다고 예수님께서 분명이 말씀하셨다.
이 세상은 잠시다.
죽음을 거부하든 미루든 인생은 잠시일 뿐이다.
인생은 한 번 주어진다.
대학은 떨어져도 재수해서 다시 들어 갈 수 있지만 천국은 한 번 떨어지면 다시는 들어 갈 수 없는 곳이다.
대학을 가기 위해서도 잠을 줄이고 밤을 새워 공부하는데, 천국에 가기 위해서 우리는 어떠한 노력을 하는가?
견진은 영혼이 어른이 되는 성사라 했다.
어른과 아이는 철이 들었느냐 철이 들지 않았느냐로 구별 된다.
한자에서 도리나 사리를 안다는 뜻을 가진 ‘밝을 哲’자는 ‘입구 口’변에 ‘손수 扌’자와 ‘도끼 斤’ 또는 ‘무게 斤’자를 모아 만든 글자다.
이렇게 ‘밝을 哲’자는 도끼를 손으로 잡고 입을 자는 형상을 하고 있다.
또 ‘밝을 哲’자는 저울로 입의 무게를 다는 형상을 하고 있다.
구약의 다니엘 예언서를 보면 유다 여호야킴 왕 때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가 쳐들어와서 다니엘, 하난야, 미사엘, 아자르야 등 많은 유다 청년들을 잡아 자기네 나라로 데려 갔다.
그 중 다니엘은 꿈과 문자를 해석하는 특별한 은사를 받았다.
네부카드네자르의 아들 벨사차르라는 임금이 천 명에 이르는 대신들을 위한 큰 잔치를 벌이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이 오르자 베사차르 임금은 자기 아버지 네부카드네자르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약탈해온 금잔과 은잔을 내오라고 하였다.
임금은 대신들과 왕비와 후궁들과 함께 그것으로 술을 마시려는 것이었다.
그것들로 술을 마시며 금과 은, 청동과 쇠, 나무와 돌로 된 우상 신들을 찬양하였다.
그때 갑자기 사람 손가락이 나타나, 촛대 앞 왕궁 벽에 글자를 쓰기 시작하였다.
임금은 새파랗게 질려 부들부들 떨었다.
임금은 주술사와 점술사들을 데려오라고 외쳤다.
글자를 해석하는 이에게 많은 보물을 주고 나라에서 셋째 가는 높은 벼슬을 준다고 했지만 그들누구도 글자를 해석하기는커녕 읽지도 못하였다.
벨사차르 임금은 크게 놀라며 얼굴빛이 달라지고 대신들은 혼란에 빠졌다.
그때에 왕후가 예루살렘에서 잡아온 청년 다니엘이 그 문자를 해독해 줄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다니엘이 임금 앞으로 불려 왔다.
다니엘은 글자를 임금님께 읽어 드리고 그 뜻을 설명해 주었다.
“왕궁벽에 쓰여진 글자는 ‘므네 므네 트켈’, 그리고 ‘파르신’입니다.
그 뜻은 이렇습니다.
‘므네’는 하느님께서 임금님 나라의 날수를 헤아리시어 이 나라를 끝내셨다는 뜻입니다.
‘트켈’은 임금님을 저울에 달아 보니 무게가 모자랐다는 뜻입니다.
‘프레스’는 임금님의 나라가 둘로 갈라져서, 메디아인들과 페르시아인들에게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바로 그날 밤에 벨사차르 임금은 살해되었다.
도끼로 입을 자르거나 저울로 입의 무게를 다는 형상을 하는 ‘밝은 哲’자는 ‘심판’을 상징한다.
다니엘 예언서의 벨사차르 임금은 삶의 무게가 모자라서 파국을 맞고 있음을 상징하는 글자다.
또한 哲자 우리의 운명에 대해서도 예고하는 무서운 글자다.
하지만 우리는 ‘성인 聖’자를 보며 인생의 최종 문제인 사말(四末), 곧 죽음과 심판과 천당과 지옥의 문제를 어둡고 무섭게만 당하지 않고 빛과 희망을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한자에서 거룩하다는 뜻을 가진 ‘성인 聖’자는
‘귀 耳’변에 ‘윗분에게 드리다’ 또는 ‘윗분에게 드러내 보인다’는 뜻을 가진 ‘드릴 呈’자를 모아 만든 글자다.
하느님의 사람, 곧 성인이 된다는 것은
‘성인 聖’자의 모양에서 보듯이 자신의 귀를 하느님께 돌리려 하느님의 뜻과 말씀과 경청하는 것이요,
자신의 행복도 불행도 하느님께 모두 봉헌하는 것이요 맡기는 것이다.
에수님께서는 왜 하필이면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셨겠는가?
그는 제자들의 발끝이 언제나 당신 쪽을 향하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우리가 미사를 참례하러 집에서 성당으로 오는 발걸음이나 미사를 참례하는 것이나 예물을 봉헌하는 행렬은 모두 우리의 발끝이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제대를 향하는 형상을 한다.
이렇게 우리는 자신을 하느님께 귀를 기울이는 것이요 하느님께 자신을 바쳐드리는 ‘거룩할 聖’자를 실천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께로 우리의 삶이 기울어져 가도록 하는 聖자를 통해 심판을 상징하는 哲자에서 빛과 희망을 발견해야 한다.
견진성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인생의 마지막을 내다보는 혜안을 갖게 해준다.
인생의 마지막이 어떠한 것인지, 또 내가 어떻게 맞아야 하는지를 알게 되면
삶의 나침판인 신앙생활과
하느님의 생명과 사랑을 받는 은총생활과
그리고 하느님을 향해서 걸어가는 계명과 수덕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견진성사를 받은 분들이나 이제 견진을 받고자 하는 분 모두가 신앙과 은총 생활을 잘 하며,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고 덕을 닦아 빠짐없이 지옥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길 바란다.
하지만 신앙은 삶의 상황에 따라 쉽게 변하거나 약해지기 때문에 육신 건강을 돌보듯이 신앙을 살펴야 한다.
신앙의 으뜸 스승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시고 기르시고 수난과 부활의 길을 함께 가신 성모님이다.
그 다음으로는 ‘거룩할 聖’자를 이루신 하느님의 사람들인 성인들이다.
우리가 더 쉽게 참된 신앙을 본받을 수 있는 분들은 같은 땅에 발을 딛고 같은 하늘에 머리를 두셨던 우리나라의 순교자들이다.
이 땅의 순교자들은 우리 조상들이기에 유전적으로 우리와 가장 가깝고 기질 또한 가깝다.
우리나라 순교자들에 대한 각별한 신심을 가져 그분들에게서 바르고 참된 신앙을 배워야겠다.
또한 성체를 통하여 하느님의 은총, 곧 하느님의 생명과 사랑을 우리 삶에 충분히 충전하도록 해야겠다.
주일미사만 겨우 참석하는 신자가 아니라 평일미사에 자주 참석해서 교우들과 공동으로 기도하고 성체를 모시고 공경하길 견진을 준비하는 신자와 이니 견진을 받은 신자들에 간곡히 당부한다.
이번 견진성사를 받으며 버드내 본당 모든 교우의 영혼에 무서운 ‘밝을 哲’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람인 ‘성인 聖’자가 새겨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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