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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스크랩] 영원한 삶 / 차동엽 신부

by 안나 무지개 2012. 8. 17.

 

 

영생일까 윤회일까 / 차동엽 신부

 


미완성본입니다. 영성생활을 위한 도움말이 보충될 예정입니다.

 

‘팡세’라는 책으로 한국 사람들에게도 많이 알려진 파스칼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는 신념에 집착하는 사람들에게 답답한 심정에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죽은 다음에 천국이 있느냐 없느냐하는 것은 어차피 확률이 1대 1이다.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확률은 똑 같다. 자 그렇다면

도박을 해보자. 서로 반대 경우가 사실이라면 결국 손해는 누가 보게 되는 것인가? 천국이 없다고 생각하고 이 세상을 함부로, 엉망으로

살았는데, 죽어서 보니 하느님도 있고 천국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인가, 아니면 천국이 있다고 믿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는데

하느님도 천국도 없는 경우의 사람인가? 결국 누가 낭패를 맞이하게 되겠는가?”

단 3분 만에 모든 것이 종료된 ‘대구지하철 참사’는 우리에게 많은 물음을 던지게 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근원적인 물음 하나가 이

물음입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장나는가? 죽으면 인간의 생명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대체로 이 물음에 대하여 인류가 알고 있는 답은 여러 가지 입니다.
어떤 이들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죽으면 미련 없이 끝이라는 겁니다. 소멸된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죽으면 윤회한다’고 믿습니다. 죽으면 다음 세상에서 다른 생명체로 환생해서 생명을 존속한다는 겁니다. 사람에서 돼지로,

돼지에서 개로, 개에서 선업을 잘 쌓으면 다시 사람으로 돌고 돌다가 수억 겁을 지나서 윤회의 틀을 벗어나 ‘열반’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죽으면 영적인 세계(이데아세계)로 돌아간다고 믿습니다. 죽으면 영혼이 육체의 감옥을 떠나서 영혼의 본래 고향인 이데아의

세계로 귀향한다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은 죽으면 하느님 품으로 가서 영원한 삶을 누린다고 믿습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온 행실(믿음)에 맞갖은

천국-연옥-지옥이라는 영원한 삶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과연 어느 답이 맞는 답일까? 사람마다 팽팽하게 자신들의 입장을 고수합니다. 그런데, 대체로 둘째부터 넷째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인생을 보다 진지하고 보람되게 살려고 하는 반면 첫째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은 인생을 싫컷 즐기겠다는 자세를 취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는

이런 사람들을 빗대어 말했습니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내일이면 죽을 테니 먹고 마시자’ 해도 그만일 것입니다.”(1 고린 15,32)

 

민감한 사안

앞에서 던진 물음들을 본격적으로 파고들때 만나는 주제가 ‘종말’의 문제입니다. ‘종말’은 마지막 일들, 곧 죽음, 심판, 천국, 지옥 등을

포괄적으로 일컫는 단어입니다. 교회에서 이 종말에 대하여 말할 때, 우리는 크게 두 가지 의미로 말합니다. 즉, 죽음, 부활, 연옥, 영원한

생명과 같은 ‘개인의 운명’과 관련지어 ‘종말’을 일컫기도 하고, 주님의 날, 세상의 종말, 심판,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관련된 ‘역사의 운명’과

연관해서 ‘종말’을 얘기하기도 합니다.
‘종말’에 대해서 아주 조심스럽게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종말’에 대한 신앙이 잘못 빠지면 삼천포로 빠집니다.

10여 년 전 다미선교회(다가올 미래를 위한 선교교회)를 비롯한 250여개의 교회 10만여 신도들이 1992년 10월 28일 자정에 의인들이 공중으로 산 채로 들어 올라가는 휴거가 있을 것이라는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며 민심을 불안케 한 일이 있었습니다. 외골수 종말론에 빠진 사교집단들이 사람들의 불안심리를 파고들어 세력을 넓히면서 집단자살을 기도하는 등 각종 사회문제를 가져오기도 하였습니다.

인류 종말에 대한 세간의 관심은 구약시대부터 시작되어 지속되어 왔습니다. 특히 1백년 시간 단위의 끝이나 1천년 주기(밀레니엄)의 마감을

앞두고 여지없이 갖가지의 종말론이 고개를 치켜들었습니다. “99년7월 하늘에서 공포의 대왕이 내려오리라”는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등

‘세상 끝’을 단정하는 불길한 예언들도 세기말을 사는 사람들의 여린 의식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서는 종말에 대하여 무엇을 말하고 있느지부터 들어가 보겠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까?


무시무시한 일들에 대한 예언,
종말에 대한 성서의 묘사는 한마디로 섬뜩합니다. 대표적인 것만 소개해봅니다.

천체에 무서운 일이 벌어질 것을 묘사합니다. “해는 빛을 잃고 달은 피같이 붉어지리라. 야훼께서 거동 하시는 날, 그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이런 일이 있으리라.”(요엘 3,4)

악마와의 전쟁이 일어날 것을 얘기합니다. “그들을 현혹시키던 그 악마도 불과 유황의 바다에 던져 졌는데 그 곳은 그 짐승과 거짓 예언자가

있는 곳입니다. 저기에서 그들은 영원무궁토록 밤낮으로 괴롭힘을 당한 것입니다.” (묵시 20,15)

상상도 못할 지옥 얘기도 나옵니다.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거지지 않는다.” (마르9,48) “그들에게 고통을 주는

그 불과  유황의 연기가 그 구덩이에서 영원토록 올라올 것이며 그 짐승과 그 우상에게 절을 하고 그 이름의 낙인을 받는 자는 밤에도 낮에도

휴식을 얻지 못할 것이다.”(묵시 14,11)                

종말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종말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은 대부분 상징과 비유로

알아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성서에 나오는 천국의 이미지들인 하프나 면류관, 금 등은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상징적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하프는

기쁨과 평안을 강렬하게 암시할 수 있는 것이 음악이기 때문에 등장하고 있고, 면류관은 하느님과 영원히 연합된 사람들이 하느님의 광채와 힘, 기쁨을 함께 누린다는 사실을 암기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습니다. 또 금은 시간에 매이지 않는 천국의 영원함과 귀중함을 암시합니다. 

또한 지옥의 ‘유황불’이나 ‘구더기’ 등은 이승에서처럼 실재하는 것들이 아니라 ‘그만큼 고통스럽다’는 것을 표현해 주기 사용된 상징입니다.

3차원 공간인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이 4차원 이상인 저 세상을 짐작하고 표현하는 방식이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래서 분명한 개념으로 설명하기 보다는 상징 언어로 소묘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징들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사람은,

비둘기처럼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을 낳으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종말에 대한 가르침을 제대로 해석하고 이해하기 위해서 예언서의 비유와 상징적 표현들을 제대로 해석할 줄 아는 성서 신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전통과 성서적 전거를 기반으로 해서 올바르게 해석해야합니다. 특히 종말에 대한 표현이 많이 나오는 요한묵시록이나 묵시문학은

박해 시대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나온 문헌들이기 때문에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서 그 메시지를 알아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한 시대의 특수

상황이나 문화적 한계를 드러내는 요소들까지 절대 진리로 고백하고 집착하는 ‘시한부 종말론’ 이론은 억지입니다. 더구나 사람들의 올바른

판단력을 마비시켜 정상적인 사회생활, 가정생활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도 큰 해악입니다.
그러니 잘못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 시기를 구체적으로 정해놓고 휴거를 기다리다 1987년 32명이 집단 자살한

오대양 사건, 요한 묵시록의 예언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여 예수가 1000년 뒤에 재림해 천년왕국이 시작되면 세상이 끝나거나 무시무시한

대이변이 일어난다며 이 날을 준비하라고 주장하는 천년왕국 신봉자들, 예수의 재림시기를 1874년, 1914년, 1918년, 1925년, 1966년,

그리고 1975년 이며 무려 여섯 차례에 걸쳐 공언 했지만 모두 빗나간 ‘여호와의 증인’ 등의 예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확실한 사실

 

그렇다면, 종말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은 무엇을 얘기하고자 하는가?

우리는 다만 성서의 가르침과 역사를 거쳐 오면서 사람들에 의해 경험되고 검증되어 교의로 확정된 것에 따라 종말에 대해 짐작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성서에서 말하고 있는 종말에 대한 가르침은 다음의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언제 올지 어떻게 올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에 있는 천사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마르 13,32) 개인의 종말이든 인류 역사의 종말이든

종말의 때는 하느님 이외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둘째, 기회는 단 한 번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단 한번 죽게 마련이고 그 뒤에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히브 9,27) 불교의 윤회론이 다음 세상에서 또 한 번의 삶이 약속되어 있는

것에 반해서 그리스도교의 종말은 한 사람의 일생에 있어 단 한 번 밖에 없는 소중한 기회입니다.

 

셋째, 미리 징조(=전조)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장차 많은 사람이 내 이름을 내세우며 나타나서 ‘내가 그리스도다!’하고 떠들어대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속일 것이다.

또 여러 번 난리가 일어나고 전쟁 소문도 듣게 될 것이다. 한 민족이 일어나 딴 민족을 치고, 또 곳곳에서 기근과 지진이 일어날 터이다.”(마태 24,4-8) 기상이변, 전쟁, 거짓선지자들의 득세 뿐만 아니라 인간 지식의 발달로 인한 생명파괴, 인간의 타락 등으로 인한 자연적 사회적 혼란의 징조를 보고 종말을 예감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이런 징조를 보고 대비하는 지혜를 가져야합니다.

 

넷째, 악마가 영원히 제압된다는 사실입니다.

“천사들이 나타나 선한 사람들 사이에 끼어 있는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처넣을 것이다. 그러면 거기서 그들은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마태 13,50)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세상 마지막 날의 승리가 비로소 종말에 이루어집니다.

악의 세력에 대한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승리가 완성됩니다.

 

다섯째, 의인, 악인으로 갈려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떨치며 모든 천사들을 거느리고 와서 영광스러운 왕좌에 앉게 되면 모든 민족들을 앞에 불러놓고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갈라놓듯이 그들을 갈라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자리잡게 할 것이다.”(마태 25,31-32) 심판은 단죄가 아니라 올바르게

만든다는 것을 뜻합니다. 참되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 일치를 이루는 순간이 이 심판을 통해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들어가서 해와 같이 빛날 것입니다.

”(마태 13,43)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육체를 영혼과 결합시키심으로써 영원히 썩지 않는 생명을 육체에 돌려주십니다.

종말에 있을 일에 대해서 이 이상의 것을 말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성서가 명백히 전해주는 이 이외의 것을 구체적으로 날짜와

방법까지 알려고 하는 이도, 또 안다고 가르치는 이도 모두 ‘유혹하는 자’의 미끼에 넘어갈 위험이 큽니다.

 

어떻게 알아들어야 할까?

 

앞의 성서 말씀에서 보듯 종말은 상징과 비유를 통해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상징과 비유는 개념이 말하려는 것보다 더 많은 의미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누가 어떤 사람에게 “당신은 나의 태양입니다”라고 말한다면, 이 말은 다양한 뜻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태양’은 ‘희망’도

될 수 있고, ‘영웅’도 될 수 있고, ‘우상’도 될 수 있고, 또 그 밖의 여러 의미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서가 전해주는 종말에 대한

표현들은 우리가 보고 느끼고 상상할 수 있는 그 이상의 것을 가리킨다고 봐야 합니다. 종말사건은 3차원 공간의 5관을 통해 인식할 수 있는

그런 현상을 초월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만약 종말에 대해 모두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장님들이 코끼리의 부분만을 만지고

코끼리는 몽둥이라느니, 무라느니, 돌이라느니 단정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과 같습니다. 종말이 담고 있는 폭넓은 의미, 우리에게 개방되지

않은 저 너머의 세계를 인정해야합니다.

이를 전제로 이제 하나 하나 종말의 문제를 짚어보겠습니다. 전통적으로 종말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은 개별 인간과 전 인류 및

세상의 종말의 처지를 나누어 취급합니다. 개인의 종말과 관련하여 죽음, 사심판(私審判), 천당(天堂), 지옥(地獄)과 연옥(煉獄)의 실재가

구명되고, 이어 그리스도의 재림(再臨), 육신 부활, 공심판(公審判)과 세상종말의 의미가 밝혀집니다.

 

심판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사람이 죽음으로써 인생이라는 시험기간은 끝이 납니다. 그리고는 심판과 더불어 응보의 영원이 시작됩니다.

심판에 대한 신앙은 구약시대부터 있었습니다. “마지막 날에 각자의 행실대로 보상하는 것은 주님에게 있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집회 11,26)
신약성서는 심판을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그분과의 마지막 만남이라고 하는 관점에서 주로 이야기하지만, 각자가 죽은 뒤 곧바로

자신의 행실과 믿음에 따라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것도 반복하여 천명합니다. 이에 가톨릭 교회는 성서에 근거해서 심판에는 공심판과

사심판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공심판

공심판(公審判)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세상 마지막 날에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포함한 온 인류가 받게 되는 최후의 심판입니다.

“죽은 이들이 모두 그의 음성을 듣고 무덤에서 나올 때가 올 것이다. 그 때가 오면 선한 일을 한 사람들은 부활하여 생명의 나라에 들어가고

악한 일을 한 사람들은 부활하여 단죄를 받게 될 것이다.”(요한5,28-29)
또 앞에서 인용한 마태복음 25장의 진술도 마지막 때에 마치 목자가 ‘염소’와 ‘양’을 가르듯이 ‘악인’과 ‘의인’을 가를 것임을 말해줍니다.

하느님의 나라의 완성은 선인과 악인을 갈라놓는 이 공심판을 통해서 실현됩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정의를 실천에 옮기며 살아온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에 결정적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지 않은 사람들은 하느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쫓겨나게 될

것입니다.

 

사심판

사심판(私審判)은 우리가 죽은 다음에 하느님 앞에 설 때 개인적으로 받는 심판을 말합니다.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나가는 날에는

우리가 머물러 있는 동안에 한 일들을 숨김없이 드러나서 잘한 일은 상을 받고 잘못한 일은 벌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2고린5,10)
각 사람은 죽자마자 사심판을 통해서 자신의 삶에 대한 영원한 갚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심판의 기준이 무엇이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2장은 그 기준에 대해서 말해줍니다. 사도 바울로는 3가지 기준을 단계적으로 제시합니다.

 

첫 번째 기준은 ‘양심’입니다.

이는 율법도 모르고 그리스도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기준입니다. “이방인들에게는 율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본성에 따라서

율법이 명하는 것을 실행한다면 비록 율법이 없을지라도 그들 자신이 율법의 구실을 합니다.”(로마 2,14). “사람들의 비밀을 심판하시는

그 날에 그들의 양심이 증인이 되고 그들의 이성이 서로 고발도 하고 변호도 할 것입니다.”(로마 2,16)

 

두 번째 기준은 ‘율법’입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모르던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기준입니다.

“율법을 가지고도 죄를 지은 사람들은 그 율법에 따라 심판받을 것입니다.”(로마 2,12)

 

세 번째 기준은 ‘믿음’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진 이후의 기준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는 길이 드러났습니다. 그것은 율법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 하느님께서는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무런 차별도 없이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십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로마 3,21-22)

우리는 이들 사이에 등급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양심이라는 기준은 주관적이고 그 기준을 통과하기가 여간 어렵지가 않습니다.

이래도 가책을 느끼고 저래도 가책을 느끼는 것이 양심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기준은 객관적이고 분명해서 양심보다는 통과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으로 ‘의인’ 인정을 받는 사람을 만나기란 하늘의 별따기 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기준은 양심과 율법의 기준보다 수월합니다.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고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인 것입니다.

믿음을 버리고 율법이나 양심의 기준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미련하고 불행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하튼 그 심판의 결과에 따라서 정화를 거치거나, 곧바로 하늘의 행복으로 들어가거나, 곧바로 영원한 벌을 받는 것입니다.

바로 지옥, 연옥, 천국행이 결정된다는 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지옥을 만드셨을까?

 

교회는 지옥의 존재와 그 영원함을 가르칩니다. 성서는 지옥에는 유황불이 들끓고 있고 구더기가 득실거리는 곳으로 묘사합니다.

근래에 와서 신학자들은 지옥에 대해서 심각한 물음을 물었습니다. 과연 성서가 말하는 그런 지옥이 존재할까?

그리고 그런 지옥을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몸소 만들어 놓으셨을까? 그렇다면 그 하느님을 우리는 과연 무한한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을까? 고민한 결과 가톨릭교회는 다음의 결론을 취하였습니다.

 

첫째, 지옥은 불이 활활 타거나 사람을 질식시키는 그런 장소가 아니라, 인간이 창조된 목적이며 인간이 갈망하는 생명과 행복을 주시는

 유일한 분이신 하느님과의 영원한 단절에 처하는 고통의 상태(status)를 말한다는 것입니다. 사죄(死罪)를 뉘우치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죽기를 고집하여 영원히 하느님과 단절되는 것 자체가 영원한 고통이며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지옥’이란 이처럼 하느님과 복된 분들과 이루는 친교를 스스로 결정적으로 거부한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는 이런 고통을 이미 이 세상에서

죽도록 사랑하던 사람과 헤어져야만 할 때 ‘맛보기’로 치루게 됩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 1033-1035항)

 

둘째, 이런 지옥의 고통은 하느님이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떨어져 나감으로써 초래하는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곧 선택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지옥에 대한 성서의 단언과 교회의 가르침은 인간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위하여 책임감을 가지고 자신의 자유를 사용하라고

하는 호소라고 볼 수 있습니다. 동시에 그것은 회개하라는 절박한 호소이기도 합니다. 한 인간이 이웃을 물리치고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배척한다면 그의 삶 안엔 이미 지옥이 전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남을 바라볼 줄 모르고 영원히 자기 자신으로만 만족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존재 방식 자체가 이미 지옥입니다. 그래서 흔히 지옥의 문은 안쪽에서 잠겨 있다고들 합니다.
지옥이라는 주제는 예수님의 복음 선포 속에서 중요한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지옥은 주로 회개를 촉구하시는 말씀 중에 거론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이야기에서 인간은 구원될 수도 버림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계십니다. 하느님의 주권에 자신을 전적으로

맡기라고 엄중하게 촉구하십니다.(히브 9,27; 마태 22,13; 25,26. 31-46; 25,30)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느님의 주권을 자신의 것인 양

착각하는 자체가 지옥의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지옥에 대한 주님의 말씀은 우리의 지적 호기심을 채워 주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양심과 의지를 일깨우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무시무시한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확신시킴으로써 우리를 행동으로 이끌 수 있다면, 이 말씀은 원래의 의도를 다 성취시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연옥은 정말 있는가? 
  
가톨릭 교회는 ‘연옥’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연옥에 대한 가르침은 구약의 마카베오후서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유다 마카베오는 이방인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유다인들의 시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유다는 그들이 우상의 부적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합니다. 그들이 성전(聖戰)에 참전하여 전사한 사실은 의로우나, 우상을 섬기는 일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유다는 죽은 자들이 범한 죄를 모두 용서해 달라고 애원하면서 기도를 드렸습니다.“그러므로 그(유다 마카베오)는 죽은 이들이 그들의

죄에서 풀려나도록 그들을 위하여 그 속죄의 제물을 드리게 하였다”(2마카 12,42)
만일 ‘천국’과 ‘지옥’밖에 없었다면 유다인들은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해줄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미 의인 아니면 악인, 곧 천국 아니면

지옥으로 분명히 판가름이 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은 전사자들은 안타깝게도 ‘반쪽 의인’들이었습니다. 교회는 이렇게 ‘반쪽 의인’인

사람들이 천국에 가기 전에 거치는 정화의 단계를 연옥이라고 보았습니다.

또 베드로 1서의 말씀도 ‘연옥’을 시사합니다. “이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갇혀 있는 영혼들에게도 가셔서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습니다.

”(1베드 3,19) 분명한 것은 여기서 ‘갇혀 있는 영혼들’이 지옥의 처지에 있는 영혼들이 아니고, 그렇다고 천국의 처지에 있는 영혼들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도 저것도 아닌 연옥의 상태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초기부터 이렇게 죽은 이들을 존중하고 기념하였으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특히 미사성제를 드렸습니다.

이는 구약의 권고를 따른 것입니다. “산사람 모두에게 은덕을 베풀 것이며 죽은 사람에게까지도 은덕을 베풀어라.”(집회 7,33) 연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성서의 내용은 빈약하기 짝이 없지만, 교회의 오랜 전통을 통해 연옥이 실재한다는 사실은 검증되었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공식적으로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서 죽었으나 완전히 정화되지 않은 사람들은 영원한 구원이 보장되기는 하지만,

하늘나라의 기쁨으로 들어가기에 필요한 거룩함을 얻기 위해 죽은 후에 정화를 거쳐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 정화를 우리는 연옥(煉獄)이라고 합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 1030-1032항 참조)

 

연옥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은 매우 신중합니다. 보통 신앙인들은 연옥이란 하느님이 아주 약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선하지도 않은 인간을

벌하기 위해 만드신 일종의 ‘반지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보다는 ‘반천국’으로 보는 것이 옳습니다. 부족한 인간에게 보속과 정화의

기회를 준 자비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연옥은 완성되지 않고 사랑 속에서 성숙되지 않은 인간이, 거룩하고 무한하며 사랑이신

하느님을 만나는 과정에서 치루는 정화 자체를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연옥은 순수 사랑과 거룩 앞에, 불순한 자신이 심히 부끄럽고

고통스러운, 그래서 정화되는 만남인 것입니다.
넓게 봤을 때, 연옥은 천국의 일부입니다. 그러므로 개신교에서 천국과 지옥만 있다고 믿는 것과 가톨릭의 교리는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개신교에서도 개인에 따른 상급의 차이를 얘기하고 천국의 다채로운 차원을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사로운 교리의 차이  때문에 등지고 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천국의 모습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간직하고 죽는 사람들과 완전히 정화된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살게 됩니다. 이렇게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와 함께하는 완전한 삶, 삼위일체와 동정 마리아와 천사들과 모든 복되신 분들과 함께 하는 삼위일체의 생활과 사랑의 친교를

“천국”이라고 부릅니다. 천국은 인간의 궁극적 목적이며 가장 간절한 열망의 실현이고, 지고하고 결정적인 행복의 상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우리를 위하여 천국을 ‘열어’주셨습니다. 천국은 그리스도와 온전히 한 몸이 된 모든

사람들의 복된 공동체입니다. 천국은 완성된 형태의 사랑이며 통교입니다.

그리스도가 서로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서 당신의 모습을 드러낸다면 인간이 서로를 위해서 존재하고 서로 사랑하고 있는 곳에 이미 천국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 1023-1036항 참조)

종말사건에 관한 전통 교리에서 천국, 지옥, 연옥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을 성취하는데 의미 깊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미래가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우리는 앞으로 존재하게 될 것은 현재를 미래 속으로 연장시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앞으로 언젠가 존재하게 될 것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기 위해서는 현재의 우리 삶을 보고 이를 미래에로 연장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내 자신의 (신앙적인) 삶의 질에 따라서, 나는 이미 지옥, 연옥, 또는 천국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단지 우리가 상상하는 대로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삶의 질, 곧 사랑, 거룩, 의미 자체가 지옥과 연옥과 천국을 결정짓는다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의 차이를 우리가 자주 들었던 이야기를 통해 쉽게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진수성찬을 차려놓은 연회에 많은 사람들이 초청됩니다. 그런데 참석자들은 식사용으로 모두 길이가 일 미터나 되는 젓가락과 숟가락을

제공받습니다. 한 그룹의 참석자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젓가락과 숟가락으로 음식을 담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가지 않고 다른 이웃

참석자들의 입에 서로 넣어 줍니다. 그래서 각자 다른 참석자들로부터 음식을 선사 받으며 서로 감사하면서 기쁘게 식사를 즐깁니다.

그런데 다른 그룹의 참석자들은 음식을 담아 제 각기 자기 입으로 넣으려 하나 젓가락과 숟가락이 너무 길어서 음식을 제대로 먹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손을 크게 벌리면서 이웃의 몸과 서로 부딪히게 되어 시비가 오가고 비난하며 다투는 아비규환의 혼란이 벌어집니다.

이 비유는 똑같은 처지에서 남을 생각하면서 배려하는 사랑이 활성화되는 처지가 천국이고, 이웃의 존재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행복만을 추구하는 자애심에 사로잡혀 모든 이웃과의 관계가 단절된 가운데 삶이 실패하게 되는 처지가 지옥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삶
  
천국의 삶은 사도신경의 마지막 고백내용인 ‘육신이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육신의 부활은, 지난 번에 보았듯이, 인간을 영혼과 육신으로 나누어 보는 이단적인 견해에 반대하는 성서적인 의미에서의 전인적인 부활을

말합니다.
“이 썩을 몸은 불멸의 옷을 입어야 하고 이 죽을 몸은 불사의 옷을 입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썩을 몸이 불멸의 옷을 입고 죽을 몸이 불사의

옷을 입게 될 때에는 승리가 죽음을 삼켜 버렸습니다.”(1 고린토 15,53-54)
즉, 인간의 영혼만 훌쩍 떠나서 갑자기 고상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살던 ‘아무개’의 인격, 인간성, 전인간이 부활하되 썩을

몸이 ‘불멸의 옷’, ‘불사의 옷’을 입게 된다는 것입니다. 3차원의 존재가 상상할 수 없는 차원의 존재로 바뀌어 영광스럽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누리게 되는 것이 영원한 삶입니다. ‘새로운 피조물’(2고린 5,17)로서 창조주이시며 구세주이신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과 기쁨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는 영원한 삶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역사와 시간과 세계를 넘어선, 전혀 다른 인간의 미래가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진리이신 그리스도 앞에서 각 사람이 하느님과 가진

관계의 진상이 결정적으로 밝혀질 것입니다. 그 날에는 피조물들이 저지른 모든 불의에 대한 하느님 정의의 승리와 당신의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오늘서부터 영원을 살자

 

종말의 때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인간은 모두 자신이 살아가는 궁극적 의미를 묻습니다. 이 세상의 것은 모두 사라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젊고 건강한 사람도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사람도 역시 언젠가는 나이 들고 멀지 않아 죽습니다. 멀지 않아 자신에게 다가올 노후의 일이나 죽음을 생각할 때 우리는 인생을 심각하게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종말은 인간 모두에게 절대절명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말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가 죽은 후 맞이할 내세나, 혹은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먼 미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서는 미래와 내세만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먼저, 이스라엘 백성은 현실의 고통과 위기에 처할 때에, 주님이 오시어 자신들을 구원해 주실 ‘주님의 날’을 기대했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종말의 때’에 대한 약속은 미래의 이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 역사 안에서 실현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다음으로, 신약에서의 종말론은 하느님의 나라와 직결됩니다. 하느님의 다스림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 안에서 시작되지만,

그 나라의 마지막 완성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이를 가리켜 ‘실현과정의 종말’ 또는 ‘시작된 종말’이라 말합니다.

하느님의 다스림이 결정적으로 드러나게 된 하느님 나라의 도래는 이미 나자렛 예수님의 삶과 인격 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라면 우리는 지금 종말 시대에 살고 있는 셈입니다. 예수님이 육화되어 오신 이래로 종말은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역사적 삶 안에서 ‘하느님의 나라’가 동텄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마지막 시대의 끝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완성, 곧 종말입니다.

그런데 이 나라가 완성되는 때, 즉 종말이 언제 닥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그때가 언제 올는지 모르니 조심해서 항상 깨어 있어라”(마르13,33)
이는 하느님 나라의 완성과 주님의 재림 때까지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펼쳐 나가는 일에 언제나 긴장을 늦추지 말라는 당부입니다.

 

희망의 끈을 붙들고

희망이 있습니다. 죄인에게도, 창녀에게도, 도둑에게도, 알코올 중독자에게도, 살인범에게도 희망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올 것이고 또 내게 오는 사람을 나는 결코 밖으로 쫓아내지 않을 것이다.”(요한6,37)
그 누가 하느님 아버지의 대자 대비한 사랑 안에서 제외 될 수 있겠습니까. 그 누가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과 무조건적인 용서에서 제외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제외 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니 누구도 종말의 때이건, 아니건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에서 제외될 수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니 바로 지금 주님에게로 돌아서십시오.
희망을 붙들고 종말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나라의 본질인 정의와 평화와 사랑과 진리의 분위기를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만들어

나감으로써 그 나라의 완성을 깨어 준비해야합니다.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그날을 준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날은 도둑처럼 온다고 하셨습니다(마태 24,43) 그러니 세상의 것에 마음이 쏠리지 말고 항상 기도하고

깨어있어야 합니다.
대구 지하철 참사 때, 어느 크리스챤이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보, 여기 불 속이오. 나 먼저 갑니다. 아멘!”
이 ‘아멘’의 마음으로 매순간을 살아야 합니다.

 

둘째, 맡은 일에 충성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각각 재능에 따라 달란트를 주셨는데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은 그것을 셈하는 날입니다(마태 25,19) 많이 일한 사람은 칭찬과

상급이 있을 것입니다(마태 25,21).

 

셋째, 거룩한 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 영혼과 몸이 온전히 거룩하고 흠이 없어야 신부의 자격으로 신랑을 맞게 될 것입니다.(1데살 5,23) 거룩함이 없이는

다시 오시는 주님을 뵈올 수 없을 것이므로 (히브 12,14) 거룩하게 살아야합니다.

 

넷째, 복음 선교에 열심해야 합니다.

“하늘 나라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 모든 백성에게 밝히 알려질 것이다. 그리고 나서야 끝이 올 것이다." (마태 24,14) 그날이 오기까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인간의 구원이란 결코 자기 한 사람만의 것일 수는 없음을 알고 타인의 구원을 위해서도

힘써야합니다. 자신이 구원 받는다는 것은 곧 자신을 형성하고 있는 모든 관계가 함께 영광 속에 들여 높여진다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다른 사람과 떨어져서 자신이 존재 할 수 없는 것처럼 자신과 만나는 모든 사람, 만남의 장소가 된 모든 환경과 사회,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세계 전체가 함께 영광 속에 들여 높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끝으로, ‘마지막 때’에 관련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이라는 사실을 구상 시인의 [삶과 죽음]이라는 시를 음미하면서

깨달읍시다. 

 

 

삶과 죽음 / 구상

 

 

우리 인간은 태초부터
이 우주만물과 더불어
비롯함도 마침도 없는 님의
그 신령한 힘으로 태어났다.

 

이제 이 지구란 별에 와서
육신이란 옷을 걸치게 되었지만
마침내 우리는 또다시 그 님의 품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님의 품, 우리의 그 본향(本鄕)이
광대무변한 이 우주 안에 있는지
아니 그것도 넘고 넘어서 있는지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돌아갈 고향이
저렇듯 있음을 한시도 잊지 말고
또한 거기에는 축복된 새 삶이
펼쳐질 것을 추호도 의심치 말고

 

아무리 오리무중과 같은 시대 속에서도
아무리 미혹과 방황의 표류 속에서도
아무리 칠흑과 같은 어둠 속에서도
아무리 실패와 좌절의 수렁 속에서도

아무리 파탄과 절망의 구렁 속에서도


아무리 풍랑과 격동의 와중에서도
우리는 되돌아갈 고향이 있다는 것을
굳게 굳게 믿으며 거기서 힘을 얻자.

 

그리고 그 님이 우리의 육신 속에
사람의 징표로 은혜롭게 심어주신
양심의 소리에 언제나 귀기울이며
오늘서부터 영원을 즐겁게 살자.


출처 : 체칠리아의 또 다른 루니아
글쓴이 : 체칠리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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