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베드로 성당 (Basillca di San Pietro)
원명은 산피에트로 대성당(Basillca di San Pietro)으로 성베드로 대성당이라고도 한다. 이탈리아 로마시내 바티칸에 있다. 가톨릭의 총본산으로서 유럽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 역사는 깊어서 성(聖)베드로의 무덤 위에 세워진 4세기의 바실리카식 성당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16세기 미켈란젤로를 비롯한 당시의 대표적 건축가들에 의해 전성기(全盛期)를 맞은 르네상스의 건축이념에 바탕을 두고 재건되었다. 성베드로 대성당은 동서의 길이가 211m이고 남북의 길이가 150m, 천정 평균 높이 45m, 중앙돔의 직경이 50m 그리고 종각 꼭대기까지는 153m이다. 내부 넓이는 약 18,000평방미터 정도되며 지하실 소성당들까지 합쳐서 50여 개의 제단이 있다. 수용인원은 약 2만7,000여 명이며 세계 최대의 성당이다. 성베드로 대성당 중심부에는 사도 성 베드로의 무덤이 있고 유골 일부도 모셔져 있다. 그리고 사도 베드로의 묘를 중심으로 하여 역대 교황들의 묘가 260여 개소 모셔져 있어 2 천 년 가톨릭의 역사와 전통을 느끼게 한다.
설화석고(雪花石膏), 대리석, 화강석, 석회석, 청동 등이 사용되었다. 로마는 원래 7개의 언덕으로 되어 있었는데, 그 중에 테베레강 건너의 천주교 신자들 공동묘지인 바티칸 언덕이 바로 오늘날 성베드로 대성당이 서 있는 곳이다. 원래 이곳 남쪽에는 100m 너비에 500m 길이의 타원형 경기장 겸 처형장이 있었으며, 거기에는 이집트에서 빼앗아온 동물 오벨리스크가 세워져 있었다. 서기 67년경 베드로는 네로 황제가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할 때 현재의 바티칸 대광장의 중앙 오벨리스크에서 거꾸로 못에 박혀 죽음을 당하고 바티칸 언덕에 묻혔다고 한다. 이 오벨리스크는 300여 년간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 특히 사도 베드로의 순교까지 지켜본 돌이었으므로 중세기에 와서 오늘의 위치인 성베드로 대성당 광장 한복판에 옮겨져 세워지게 되었다. 로마의 최대 명물이며 세계 인류문화의 최고 금자탑이라고 하는 현재의 성베드로 대성당은 3번째 지은 것이다. 서기 90년에 작은 누각처럼 사도 베드로 무덤 곁에 '기도소'식의 건물이 하나 있었는데 이것이 성베드로 성당의 기원이라고 한다.
베드로가 순교한 지 약 250년이 지난 서기 326년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 베드로가 묻혀있는 곳으로 믿어지는 자리 위에 성베드로 대성당이 세워졌는데 약 1200여 년간 사용하다가 이 성당의 남쪽 벽에 2~3m 너비로 몇 개의 틈이 벌어지기 시작하자, 1400년경부터 성 베드로 새 대성당 건축이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15세기에 한 번 시도되었다가 중단되었던 구당(舊堂)의 개수계획을 재개하기 위해 1506년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저명한 건축가 D.브라만테에게 명하여 본격적인 공사에 착수하게 하였다. 브라만테는 〈묵시록〉에 나오는 천상 예루살렘을 본 딴 설계도를 만들었고, 그릭크로스 플랜의 중심에 대원개(大圓蓋)를 얹고 네 구석에 한 개씩의 작은 원개를 얹는다는 구상으로, 대원개를 떠받칠 4개의 큰 지주와 그것들을 잇는 4쌍의 아치를 완성하였다. 그가 죽은 뒤 라파엘로가 여기에 긴 회당부(會堂部)를 추가한 라틴크로스 플랜을 계획하였으나 그도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뜨고 공사는 바르다살레 베르레의 손을 거쳐 A.P.da 상갈로에게로 넘어갔다. 그도 또한 궁륭(穹窿)의 일부를 착수하였다가 1546년에 세상을 떴으나, 그 동안 역대의 건축담당자들이 이 조영(造營)사업에 기울인 정열은 건물의 계획을 놀랍도록 변경시켰다. 상갈로가 브라만테의 설계를 개조해 계속 건축하다가 무너지게 되고 그 후 세상을 뜨자 교황 바오로 3세는 마침내 71세의 미켈란젤로에게 공사의 전권을 맡겼다. 미켈란젤로는 기존의 설계를 검토한 끝에 대폭 수정을 하기에 이르게 된다. 건축에서 생명이라 할 수 있는 미적 감각이 전혀 고려되지 않았고 비경제적으로 설계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릭크로스 플랜을 채용함으로써 브라만테의 안(案)으로 돌아가는 듯하였으나, 브라만테의 그것과는 달리 네 구석의 작은 원개를 없애고 건물 전체의 긴밀한 조형성과 다이내믹한 공간을 대원개를 중심으로 유기적으로 통일한다는 탁월한 구상을 하였다. 그러나 수정된 도면은 지금까지 진행되어온 건물의 3분의 2에 가까운 부분을 허물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점에서 많은 반대가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이상대로 설계하였고 여생을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공사에 전념하였다. 현재 대성당 건축물 중 가장 돋보이는 부분은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돔(dome) 지붕인데 그는 이 돔을 세우기 위해 3년간에 걸쳐 나무로 된 거푸집을 제작하였다.
일체의 보수를 사양하고 오직 신에 대한 사랑과 사도 베드로에 대한 존경에서 이 조영사업에 몸바친 그는 생애를 마칠 때까지 대원개의 기부(基部)에 해당하는 탕부르의 공사에 심혈을 기울였다. 마치 왕관을 씌운 듯한 느낌을 주는 우아하고 거대한 쿠폴라(돔)를 받치는 부분이 완성되는 것만 보고 그는 89세 때 뇌일혈로 쓰러져 1564년 2월 18일 대공사인 돔의 완성도 보지 못한 채 숨을 거두었고 유언에 따라 피렌체의 산타크로체 교회에 안장되었다. 미켈란젤로는 미술로 시작해 말년에는 건축에 몰두하여 위대한 건축가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가 떠난 후 직경 42.4m, 바닥에서 탑 십자가까지의 높이가 약 133m에 달하는 이 원개 공사는 그가 남긴 목제(木製) 거푸집과 함께 1588년 자코모 델라 볼타에게 인계되었고, 다시 도메니코 폰타나가 이를 이어받아 미켈란젤로의 설계를 바탕으로 600 여명의 인부들과 밤낮으로 공사를 계속하여 시작한지 22개월 만인 1590년 6월 교황 식스투스 5세 때 40 여 층짜리 빌딩의 높이와 맞먹는 쿠폴라를 마침내 완성하였다. 1605년 교황 바오로 5세가 새 교황에 오르면서 기존 설계에 의한 성당 크기보다 두 배 정도 더 크게 확장하도록 결정하였고 마데르나는 미켈란젤로의 설계를 변경하여 세로축이 가로축보다 더 긴 라틴크로스 평면으로 변화시켜 대성당은 현재의 모습으로 되었다. 건물 전체의 역동감을 그 아름답고 힘찬 곡선에 모았다가 허공에 해방시키는 듯한 이 훌륭한 원개는 성당 확장을 위한 신랑(身廊)의 전면(前面) 연장과 정면 가득히 펼친 칸막이와 같은 파치아타(서쪽 정면)의 증축으로 인해 그 효과가 크게 손상되었다. 헌당식(獻堂式)은 1622년에 거행되었고, 1629년 마침내 120 여 년의 세월을 머금고 교황 우르바누스 8세에 의해 완공되었다. 명장 G.L.베르니니(Bernini)가 나타나 1655년에서 1667년에 걸쳐 원주회랑으로 에워싸인 훌륭한 정면 광장을 완성시켰다. 투시효과를 교묘히 이용한 이 훌륭한 광장은 가톨릭의 총본산에 어울리는 규모와 성격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C.마데르나(Maderna)에 의해 현관 쪽을 길게 낸 정면구성으로 손상된 대성당의 모습을 살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본건물은 1450년부터 신축설계가 거론되어 1506년 부활절 다음 주일에 착공한 후 1629년 완공을 보았으나 마무리 작업까지는 330년의 세월이 걸렸다.
성베드로 대광장은 타원형으로, 장축이 340m, 단축이 240m로 로마에서 가장 넓은 광장이다. 약 40만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이 광장은 세계에서 가장 독특한 광장으로 손꼽히는 곳으로 베르니니의 작품이다.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기둥들은 성당의 입구로서 근엄한 기운을 심어주고 있고, 마치 두 팔을 벌려 모든 인류를 포용하는듯한 인상을 준다. 이 열주회랑 위에는 베르니니와 그의 제자들이 제작한 140개의 성인들의 석상이 올려져 있다. 열주회랑의 기둥들은 4열씩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데, 타원의 중심에 서서 보면 네 개의 기둥들은 모두 겹쳐져 하나로 보인다. 광장 중앙의 오벨리스크는 마치 해시계의 중심축처럼 우뚝 하늘을 향해 치솟아 있다. 그 꼭대기에 십자가가 있다. 높이가 25m, 무게가 약300톤인 이 오벨리스크는 서기 37년 이집트에서 가져와 네로황제의 경기장에 세워졌었는데, 그곳에 1,500여년 동안이나 방치되어 있다가 이곳 성베드로 광장으로 옮겨졌다. 당시 이 오벨리스크를 세우는데 5개월이나 소요되었고 양쪽의 분수들을 세우는데 8년이 걸렸다. 오벨리스크를 900명의 인원과 140마리의 말, 47대의 권선기를 동원해 베드로 성당 앞의 광장으로 옮겼을 때 로마시민들이 매우 열광하였다고 한다.
성베드로 성당이 십자가 모양을 하고 있고 광장과 합해지면 열쇠모양이 되는데, 이는 그리스도가 베드로에게 부여한 천국문의 열쇠로써 가톨릭의 교권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베드로 성당은 전세계 모든 성당의 모형(母型)인 만큼 팔을 벌려 아우르는 형태로 모든 신자들을 신앙 속에 거두어 감싸 안는 형태를 지니게 했다고 한다. 성당내부의 길이가 186.36m인 내부로 들어서면 르네상스와 바로크의 찬란한 예술품들과 웅장한 내부공간에 방문객들은 위압당한다. 거대한 돔 아래로는 1624년 교황 우르바노 8세 때 25세의 나폴리 출신 베르니니가 9년에 걸쳐 완성한 청동 발다키노(천개 天盖)가 중앙제단을 덮고 있다. 그 높이는 29m로 광장에 세워진 오벨리스크보다도 4m가 더 높다. 교황만이 이 제대를 사용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 중앙 제대 아래에 바로 성 베드로의 무덤이 있다. 오른쪽에는 13세기때 아르놀포 디 캄비오가 제작한 '성 베드로의 청동좌상'이 있다. 성당에 들어서면서 오른쪽 구석 유리창 뒤에 미켈란젤로가 24세에 제작한 '피에타(Pieta)상’이 있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내려진 그리스도가 성모의 팔에 안겨진 모습을 조각한 것이다.
성베드로 성당 건립을 위해 막대한 비용의 면죄부를 팔음으로서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되어 결국 신교와 구교가 갈라진 동기가 되었다. 성베드로 성당이 베드로가 묻혀 있는 묘소 위에 세워졌는지 아무도 단정할 수 없었는데 20세기에 들어서 실제로 베드로의 묘소임이 확인되었고 1950년 교황 피우스 12세는 이를 전세계에 공표하였다.
성베드로 성당 돔
많은 서양 여러 나라들의 건축형태에 본보기가 되었다.그 중에는 영국의 세인트폴 성당 돔, 파리의 앵발리드, 워싱턴의 국회의사당 지붕 돔 등이 있다. 바로크(Baroque) 양식은 성베드로 성당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건축뿐 아니라 회화, 조각에도 천재성을 보인 미켈란젤로는 르네상스의 규범으로 성베드로 성당 설계에 착수하였지만, 그후 마데르나에 의해 평면이 늘어나고 베르니니에 의해 타원형 광장과 사선 방향의 열주가 더해지면서 성베드로 성당은 전형적인 바로크 양식이 되었다. 바로크 양식은 그 전의 르네상스 양식과는 많은 대조를 이룬다. 르네상스 양식이 고전주의 원칙에 의한 엄격한 미학이었다면, 바로크 양식은 장식(조각)이 많이 사용되고 사선과 타원 같은 기하학적 방식이 추가되어 서정적인 면이 많이 강조된 양식이다. http://cafe.naver.com/3architecture/1372에서 기사 옮김 |